감기에 걸려 쉬려고 시작한 민화.
하지만 책가도 한 칸을 채우며 발견한 것은 그림보다 먼저 자리하고 있던 오래된 마음의 습관이었다.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 말을 어릴 때부터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감기에 걸리면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듭니다.
하필 지금?
하필 이 계절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며칠째 몸이 무겁고 목이 칼칼했습니다.
책을 읽을 기운도 없었고,
글을 쓰고 싶은 마음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누워 있기에는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민화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림이나 그리면서 쉬어야지.
분명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 쉬려고 시작한 민화
책가도는 생각보다 섬세한 그림이었다
이번에 그린 그림은 책가도와 목련, 산새가 있는 화조도였습니다.
민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그려보고 싶어 하는 대표적인 그림들입니다.
그 의미도 아름다웠고,
색을 채워가는 과정도 즐거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해 보니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책가도는 생각보다 훨씬 섬세한 그림이었습니다.
작은 칸 하나,
책 한 권,
장식 하나까지도 신경 써야 했습니다.
그림을 그린다기보다 작은 세계를 하나씩 채워가는 느낌에 가까웠습니다.


그림도 생각보다 많은 체력을 요구했다
무엇보다 체력이 많이 들었습니다.
글을 쓸 때는 키보드를 두드리면 되지만,
그림은 계속 눈으로 보고,
손으로 그리고,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집중해야 합니다.
감기에 걸린 몸에는 생각보다 버거운 작업이었습니다.
쉬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예상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 시작했으니 끝내야 한다는 마음
취미가 과제가 되는 순간
사실 그림이 힘들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쉬려고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다 끝내야 하는데.’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 하는데.’
‘조금만 더 하면 완성할 수 있는데.’
그러자 그림은 더 이상 휴식이 아니었습니다.
해야 할 일이 되었고,
완성해야 하는 과제가 되었습니다.


왜 늘 더 잘하고 싶을까
생각해 보면 늘 그랬습니다.
공부도 그랬고,
독서도 그랬고,
글쓰기 역시 그랬습니다.
좋아서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잘해야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즐거움보다 책임감이 앞서고,
호기심보다 결과가 중요해졌습니다.
🌿 그림 속 단점만 보이는 이유
완성보다 부족한 부분이 먼저 보였다
그림을 거의 완성했을 때도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완성했다는 생각보다 부족한 부분이 먼저 보였습니다.
선이 조금 삐뚤어진 곳,
색이 고르지 않은 부분,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부분.
그림을 보면서도 감상하지 못하고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성장의 습관과 기쁨의 상실
어쩌면 문제는 그림이 아니라 제 습관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무언가를 바라볼 때 잘된 부분보다 부족한 부분부터 찾는 습관.
완성보다 개선점을 먼저 보는 습관.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기뻐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기도 합니다.
🌿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왜 그런 속담이 생겼을까
옛사람들은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오뉴월은 날씨가 따뜻하고 먹을 것이 풍부하던 계절이었습니다.
몸이 가장 건강하기 쉬운 시기였기 때문에 감기에 걸리는 일이 드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 말이 생겼습니다.


몸은 쉬라고 말하는데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요즘은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에어컨이 있고,
늦게 자고,
스트레스를 받고,
쉬는 날에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몸은 쉬라고 말하는데 마음은 계속 달립니다.
오뉴월에도 감기에 걸리는 이유는 계절 때문이 아니라,
쉬는 날에도 쉬지 못하는 삶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책가도와 화조도가 알려준 것
배움을 상징하는 책가도
그림을 그리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책가도는 단순히 책을 그린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 책은 지식과 배움, 성장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책가도는
‘계속 배우고 성장하고 싶은 마음’
을 담은 그림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목련과 산새
목련과 산새가 있는 화조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목련은 새로운 시작과 희망을,
산새는 좋은 소식과 행복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련과 산새가 함께 있는 화조도에는
좋은 일이 찾아오고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그림보다 먼저 보인 것
생각해 보면 참 묘했습니다.
배움을 상징하는 책가도를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목련을 그리고 있었는데,
정작 제가 배우고 있던 것은 그림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림을 그리며 제 마음의 오래된 습관을 보고 있었습니다.
휴식을 위해 쉬엄쉬엄 그릴 생각으로 시작한 그림인데,
어느 순간 저는 또 완성을 향해 달리고 있었습니다.
쉬려고 꺼낸 붓이었는데 어느새 해야 할 일이 되어 있었고,
즐기려고 시작한 취미는 또 잘해야 하는 과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몸은 쉬어 달라고 말하고 있었는데,
마음은 여전히 앞으로 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좋아서 시작한 일도 어느 순간 잘해야 하는 일이 되어버리는 습관.
이런 습관이 있는 한 저는
취미조차도 즐거움보다 책임감이 앞서고,
설렘보다는 완성이 먼저 중요해질 것입니다.
🌿 오늘도 한 칸을 채웠다
완성보다 소중했던 발견
오늘은 책도 읽지 못했습니다.
글도 쓰지 못했습니다.
원래 계획했던 일들도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루였을까요.
감기에 걸린 몸으로 붓을 들었고,
책가도 한 칸을 채웠고,
목련 한 송이를 그렸습니다.

잘하기보다 즐기기 위한 연습
그리고 또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여전히 좋아하는 것마저 잘하려고 애쓰는 사람이구나.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오늘은 의미 있는 하루였는지 모릅니다.
오늘 제가 배운 것은 그림을 잘 그리는 방법이 아니라,
잘해야 한다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민화를 그릴 때는 조금 달라지고 싶습니다.
잘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는 시간을 좋아하기 위해서.
완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도 즐겁게 한 칸을 채웠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
🌿 그림보다 먼저 들여다본 것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다음에 또 그림을 그리면 비슷한 마음이 올라올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빨리 완성하고 싶을 것이고,
조금이라도 더 잘 그리고 싶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화조도와 책가도(by INFJSoul)
그래도 달라진 것이 있다
그래도 예전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이제는 그 마음이 올라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 마음에 끌려갔다면,
이제는 잠시 멈춰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완성보다 중요한 것을 발견했으니까요.
작은 칸 하나를 채우고,
목련 한 송이를 그리고,
저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림보다 먼저 제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으니까요.
오뉴월 감기와 책가도
– 쉬려고 시작한 그림이 일이 되어버린 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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